다큐 <나의 건축가> 줄거리(A), 줄거리(B), 결말

1974년 펜실베니아 역 화장실에서 사망한 건축가 루이스 칸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의 아들이자 감독인 나다니엘 칸은 아버지의 건축물과 지인들을 방문하면서, 단편적으로 밖에 알지 못했던 건축가 루이스 칸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게 된다.
<솔크 연구소, 킴벨 미술관, 방글라데시 국회의사당>


줄거리(A)

건축가 루이스 칸(1901~1974)의 삶을 조명한 2003년 작 다큐멘터리, 1974년 펜실베니아 역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한 그의 생애를 아들이자 감독인 나다니엘 칸의 시선으로 따라가 본다. 루의 부고란에 나다니엘의 이름은 없었다. 유일한 아들이었지만 그의 어머니는 루와 결혼하지도 않았고 함께 살지도 않았다. 루의 죽음을 둘러싼 상황이 아들인 그를 매료시켰다. 파산 상태였고 인도에서 돌아오던 중 혼자 역사 내 화장실에서 사망한 루는, 찾는 이 없이 시체안치소에서 3일간 보관되어 있었다. 나다니엘은 단편적인 기억 이외에 ‘루이스 칸‘이라는 인물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아버지의 건축물과 지인들을 방문하면서 그가 남긴 발자취를 좇는다. 첫 번째 만난 사람은 동료 건축가 필립 존슨, 루에 대한 그의 평가는 똥고집에 혼자 잘난 사람이었지만, 대중의 평판이나 고객과의 타협 없이 순수하게 예술 작품으로 건축물에 접근했고, 그 방식에는 찬사를 보낸다고 말한다. 당시 루는 많은 건물을 짓지 않았지만, 건축의 방향을 바꿔놓았다고 평가받았다. 솔크 연구소, 킴벨 미술관, 엑서터 도서관, 방글라데시 의사당 등이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루의 친구인 빈센트 스컬리는 균형과 질서, 기하학적 구조를 바탕으로 후대에도 영원히 남을 작품을 루가 원했다고 회상했다.

필라델피아 외곽에 살던 나다니엘과 어머니는 루와 같이 살지 못했고, 루가 오기 직전 전화를 했을 때 그제서야 그가 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식사하면서 인도, 호랑이와 코끼리에 관한 멋진 얘기를 듣고, 어머니와 나다니엘은 루를 시내에 있는 그의 본처에게 데려다주었다. 부인의 이름은 에스더, 딸의 이름은 수였다. 처음 학교에 들어갔을 무렵, 또 다른 가족(앤과 그녀의 딸 알렉스) 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3가족은 불과 몇 마일 내에 거주했지만, 루의 장례식 전에 그들이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고등학교 때 미술 선생님이 가르쳤던 그리스, 로마, 르네상스, 이집트, 고딕 건축양식이 건축가로서의 루의 진로 결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인간이 얼마나 우발적이고 환경에 좌우되는 존재인가를 그때 깨달았다고 한다. 다음으로 방문한 곳은 펜실베니아 대학의 리처드 의료 연구소 빌딩이다. 여기서 재밌는 점은 실제 그 건물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일하기 좋은 곳이 아니고, 새들이 창에 와서 부딪히고 온도가 일정하지 않아 사용하기 편하지 않다고 말한다. 루가 필라델피아에 지은 유일한 건물이었기에 나다니엘도 좋아하고 싶었지만, 솔직히 실망스러웠다고 평한다. 루는 에스토니아에서 태어났고 3세 때 집안의 스토브에서 옮겨 붙는 불 때문에 얼굴에 화상 흉터를 얻게 되었다.

서부로 이동하여 다음으로 만난 사람은 이오 밍 페이라는 중국계 미국인 건축가였다. 그는 루와의 만남을 회상하며, 루는 솔크 연구소가 그의 최고 작품으로 남기를 희망했다는 얘기를 해준다. 그리고 그와 루의 결정적인 차이, 고객과 의견이 다르다면 그는 조율하겠지만, 루는 끝까지 밀어붙여 고객의 동의를 얻어내는 스타일이라 자신은 루에 비해 고객을 덜 잃었다고 말한다. 나다니엘은 이오 밍 페이에게 루보다 훨씬 더 많은 건물을 짓지 않았느냐고 묻지만, 그는 양이 문제가 아니라 몇몇 걸작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건축은 시간이라는 요소가 필요해. 현대의 건축을 동시대의 누군가는 흥미롭고 멋지다고 하겠지만, 그런 평가는 20년 혹은 50년 후에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 그런 점에서 솔크 연구소는 의심할 여지 없이 시간의 시련을 견뎌내고 찬사를 받을거야” 이것이 루의 최고 걸작에 대한 이오 밍 페이의 평가였다. 솔크 연구소가 완성됐을 때 루는 65세였으면 그가 처음으로 만족한 건물로 알려져 있다. 루와 함께 솔크 연구소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잭 맥칼리스터를 만난다. 잭은 루가 고집이 있었으며, 본인의 기대에 미치지 않으면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성격이라 말한다.

시점은 과거로 돌아가 루이스 칸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그려진다. 1906년 에스토니아에서 미국으로 건너왔고 필라델피아 북부 지역에 자리를 잡는다. 학교에서는 상처 때문에 스카페이스라는 별명을 얻었고 가난했지만 펜실베니아 대학교에서 건축학 학위를 받고, ’30년 에스더와 결혼 후 딸 수를 얻는다. 에스더가 의료 연구소에서 일하면서 가계에 보탬이 되는 동안 루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기 위해 노력했고 ’47년 건축 사무소를 차렸다. ’51년 건축 학회 참석차 로마를 방문, 드디어 인생을 바꿀 기회를 발견한다. 고대 유적의 느낌과 영혼이 깃든 현대 건축물을 짓고자 한다. 동시에 사무실에서 같이 일하던 여성 건축가 앤 팅(이복누나인 알렉스의 어머니)과 깊은 관계가 된다. 앤은 루에 대해 사무실에서 살다시피 했고 가정적인 사람하고는 거리가 멀었다고 말한다. 나다니엘의 어머니와 앤 팅, 두 사람 모두 결국 루와 결혼하지 못했고, 미혼모로 살기 힘든 시기에 미혼모로 살아야 했다. 뉴저지의 지역 커뮤니티 센터 프로젝트를 협업하는 등, 앤과의 직업적인 교류는 계속 이어졌다. 그렇지만 결국 앤과 헤어지고 나다니엘의 어머니를 만나고, 루의 여자들과 아이들은 서로 존재하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기묘한 가족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60년대 필라델피아 도시계획 행정관이었던 에드 베이컨은 루에게 일을 맡기려 했으나 루의 몽상적이고 실용적이지 못한 아이디어와 제안에 결국 그의 도움을 받는 것을 포기한다. 이렇듯 루의 건축 프로젝트는 고객의 적극적인 수용과 지원이 없이는 이뤄지기 힘들었기 때문에, 절대적인 결과물의 양이 부족했다. 루의 강연을 들었던 학교 후배이자 건축가인 리처드 워먼은 유대인이라는 그의 혈통 역시 프로젝트 수주에 영향을 미쳤을 거라고 말한다.

줄거리(B)

루는 조경 건축가였던 나다니엘의 어머니 해리엇과 교류를 하게 된다. 그들은 동등한 관계에서 서로 비평하고 영감을 주는 사이였지만 이미 루와 해리엇의 사이를 알고 있던 에스더 때문에, 그녀는 작업에 직접 참여했던 킴벨 미술관의 개관식에도 참석할 수 없었다. 외삼촌과 이모들은 결혼도 하지 않고 해리엇을 미혼모로 만든 루를 좋게 보지 않았다. 킴벨 미술관 프로젝트에서도 루와 현장 직원들과의 불협화음은 계속된다. 세부 사항에 대한 조정을 요구하는 루와 이미 늦었다고 거부하는 현장 관리인은 평행선을 달린다.

건축가 로버트 스턴과의 인터뷰가 진행된다. 루는 전문가가 되길 원했고, 일을 원했고, 인정받기를 원했다고 말한다. 사망 당시 루는 50만 달러의 빚이 있었다. 루의 생전 영상에는 이미 파산이 예견된 상황에서도 미래의 고객들과 여유 있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등장한다. 솔크 연구소를 제외하고 루의 사무실에서 진행했던 프로젝트는 모두 손실이 났고, 미완성 작품도 늘어갔다. 장소는 루가 유대교 회랑 프로젝트를 맡았던 예루살렘으로 이동한다. 예루살렘의 전 시장이었던 테디 콜렉을 만나게 된다. 그는 7년 동안 유대교 회당 프로젝트에 루와 함께 참여한다. 회당 프로젝트는 루의 사망으로 중단되었고 그 일을 이어받아 끝낼 사람을 찾지 못해 중단되어 버렸다. 동시에 건물이 너무 거대하고, 그 규모 때문에 이슬람 사원과의 보이지 않는 경쟁이 생길 수 있다는 정치적, 종교적인 이유까지 더해진다.

건축가 모세 사디에프는 루에게는 기본적으로 방랑자 기질이 있었다고 평가한다. 기차역에서 죽은 건 비극이지만 그의 기질에 걸맞은 죽음인 것 같다고 말한다. 루의 아내 에스더가 생전에 남긴 인터뷰에서 루가 마음만 먹었으면 억만장자가 됐을 거라고, 그렇지만 근본적으로 소유에 대한 개념 자체가 부족했다고 말한다. 나다니엘은 필라델피아 외곽의 루가 지은 집으로 이복 누이 수와 알렉스를 초대한다. 알렉스가 루를 평가하길, 개인적인 커리어와 사생활을 둘 다 챙길 수 없었던 것 같다고 말한다. 나다니엘은 “우리를 가족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라고 누이들에게 묻는다. 나다니엘은 루가 마지막에는 어머니 해리엇과 자신을 가족으로 선택할 것으로 믿었지만 결국 루는 그들을 선택하지 않았다. 메인주에 사는 어머니 해리엇을 방문, 어머니의 선택과 결정에 대한 나다니엘의 물음이 이어진다.

결말

인도를 거쳐 이제 남은 여정은 방글라데시 한 곳이다. 나다니엘은 아버지의 역작으로 꼽히는 방글라데시 의사당(1983년 완공)을 방문한다. 아침에 의사당 주변에서 촬영하다가 의사당 직원들을 만나고, 의사당 건물을 방글라데시의 얼굴이라고 말하는 그들에게 나다니엘은 루의 아들임을 알린다. 의사당 내부를 촬영 중에 건축가 샴슬 와레스를 만나고 마지막 대화를 나눈다. “루이스 칸은 정치적인 색을 보이지 않았지만, 민주주의를 위한 시설을 제공했고, 얼마나 돈이 필요한지, 기간은 얼마나 걸릴 지를 배제하고 온전히 건물 자체에 집중했다. 목숨을 걸고 의사당 건물 프로젝트에 집중했기 때문에 사생활, 가족에게 그만한 관심을 기울일 수 없었다. 사회생활에서는 아이와 같이 미성숙한 모습을 보였지만, 그런 희생과 집중으로 이 건물을 지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내레이션을 마지막으로 다큐멘터리는 끝을 맺는다. “아버지의 모습을 제대로 알지 못했고, 5년간 그의 모습을 찾는 여행을 했으며, 그가 다른 선택을 하길 바랐지만 결국 자신이 원했던 인생을 택했다. 건축가이자 아버지인 루이스 칸에게 작별을 고할 적절한 시간과 장소를 찾은 것 같다.”

루이스 칸의 삶을 되돌아보면, 몇몇 걸작을 만들기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한 사람이라는 거 외에 적절한 표현이 생각나지 않는다. 여기서 도덕적인 잣대로 그의 삶을 평가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내내 느낀 건 결코 완벽하지 않은 한 개인의 전기이고 그를 둘러싼 3가족의 역사라는 점이다. 물론 루이스 칸만큼 강한 정신력과 에너지가 없기 때문에 사적으로 3가족을 동시에 꾸릴 생각도 자신도 없고, 커리어 적인 부분에서도 루이스 칸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후대에도 기억될 걸작을 남길 것이냐 혹은 주변 사람들과 불화 없이 지내면서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재정적 안정을 추구할 것이냐, 여기서 전자를 택하기는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저 누구도 걷기 힘든 길을 택한 한 사람의 용기에 대해서는 찬사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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